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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SS 인사이드
배틀트립
  • 안보관광지
    철원
    VS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

    • 글·사진. 송일봉 여행작가
  • 강원도 철원(Cheorwon)과 독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 두 곳 모두 큰 전쟁을 겪었다. 철원은 6·25전쟁(1950~1953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고, 하이델베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을 겪었다. 하이델베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종교전쟁인 ‘30년 전쟁(1618~1648년)’ 때도 큰 피해를 입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철원과 하이델베르크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철원은 아직도 전쟁의 상흔과 함께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반면, 하이델베르크는 유명한 대학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안보도시
철원
강원도에 위치한 철원은 총 889.43㎢의 면적에 청정한 환경에서 자란 벼와 통일한국의 중심도시,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철원은 우리 국토의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후삼국 시대에는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고장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철원은 통일을 꿈꾸는 미래의 땅으로, 기름진 철원평야에서 수확되는 오대미(五臺米)의 명산지로, 그리고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안보관광의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철원을 대표하는 안보관광지로는 철의삼각 전망대를 비롯해 월정리역, 제2땅굴, 백마고지 전적지, 노동당사 등이 있다. 일반 여행지로는 한탄강, 고석정, 도피안사 등이 있다.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 백마고지 전적지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백마고지(해발 395m)는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중국군 1만4,000여 명(포로 및 추정 사상자 포함), 우리 국군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격전지다. 당시 전투에 참여한 중국군은 정예부대인 제37군 소속의 3개 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이에 맞선 우리 국군은 제9보병사단(사단장 김종오 소장)이었다. 백마고지의 당시 이름은 ‘395고지’였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로 인해 능선의 모습이 백마의 등처럼 바뀌었다고 해서 고지의 이름을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무려 12차례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우리 국군이 승리한 전승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제9보병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이름을 받았다. 백마고지 전적지는 백마고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조성되어 있다. 백마 조형물, 위령비, 기념관, 전적비, 종각 등이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종각에서 백마고지가 선명하게 보인다.

철원 전경
역사와 전설의 흔적, 한탄강

한탄강은 북한 땅인 평강군 오리산(해발 453m)에서 발생한 화산 폭발(열하분출)로 인해 형성된 강이다. 오리산 옆에 있는 장암산(해발 1,052m)은 한탄강의 발원지가 있는 산이다. 한탄강 일대에서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현무암은 약 27만 년 전의 화산폭발로 인해 생긴 것이다. 한탄강에는 화산 폭발의 영향으로 생긴 협곡도 많다. 그래서 여름에는 래프팅 명소, 겨울에는 얼음트래킹 명소로 인기가 높다. 한탄강 일대는 지난 2015년에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고석정은 한탄강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한탄강과 고석바위 주변 풍광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고석정에는 조선 명종 때 활동했던 의적 임꺽정과 관련된 전설도 있다. 고석정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던 임꺽정은 관군이 잡으러 오면 민물고기인 ‘꺽지’로 변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고 한다.

  • 한탄강
  • 한국의 나이아가라라 불리는 직탕폭포
교훈과 숙제의 다리, 승일교

철원군 갈말읍 내대리와 동송읍 장흥리 사이의 한탄강 위에 놓인 승일교는 영화 ‘빨간 마후라’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된 다리다. 그런데 이 다리에는 기구한 사연이 있다. 남한과 북한이 각각 절반씩 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다리를 놓던 중 남침을 하면서 공사를 중단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남한에서 절반을 완성한 것이다. 이 같은 연유로 폭 8m, 길이 120m의 승일교는 다리의 아치 모양이 절반씩 서로 다르다. 승일교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오래된 다리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다리는 남북합작으로 완공되었으나 분단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이 다리는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절반의 다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철원의 대표 문화유적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철원을 대표하는 문화유적지인 도피안사는 창건 유래가 특이하다.
신라 경문왕 때인 865년. 철원 지방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도선국사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을 조성했다. 이 불상을 ‘안양사’라는 사찰에 모시기 위해 옮기던 중 잠시 취하게 되었는데 그만 불상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모두 허사였다. 나중에 이 불상이 발견된 곳이 지금의 도피안사가 있는 자리다. 그래서 스님들은 비로자나불 부처님이 스스로 계시고 싶은 곳을 찾아가신 것이라 판단해 이곳에 사찰을 짓게 되었다.
도피안사에 봉안되어 있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크기는 건장한 성인 남자의 체구와 비슷하다. 따라서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친근하고 현실감 넘치는 불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 사실적인 신체비례는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색 옷(금분)을 입고 있었으나 지금은 철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남서부 네카르 강가에 위치하고 있고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속해 있으며,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이 대학생인 대학도시이다.

하이델베르크는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한 도시다. 오늘날 하이델베르크가 이 같은 모습을 유지하게 된 데는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이 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합군에 의해 하이델베르크에 대한 대규모 공습계획이 세워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종전협상이 호전적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공습계획은 보류되었고, 결국은 가까스로 폐허의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또 다른 후문으로는 젊은 시절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를 했던 한 미군 조종사가 공습계획을 취소해 달라고 상부에 적극적으로 건의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Old bridge in Heidelberg in a beautiful summer day
구시가지 전경이 한눈에, 하이델베르크 성

하이델베르크 성은 훌륭한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꽤 넓은 발코니에서는 하이델베르크의 젖줄인 네카 강과 함께 구시가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 안에는 루프레히트 궁, 오트하인리히 궁, 프리드리히 궁 등이 있다. 가장 오래된 궁전인 루프레히트 궁은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에 의해 1400년 무렵에 세워졌다. ‘쌍둥이 천사’ 에 대한 슬픈 얘기가 전해지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걸작품’이라 평가 받는 오트하인리히 궁은 155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 정면의 각층 창문과 창문 사이에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다윗과 삼손을 비롯해 많은 고대의 신들을 의미하는 조각품들이 세워져 있다.
1607년에 완공된 프리드리히 궁은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바로 이 궁전의 지하층에 세계에서 가장 큰 포도주통(약 22만 리터)이 있기 때문이다. 건물 정면의 각층에 세워져 있는 16개의 인물조각품도 눈길을 끈다. 이 조각품들의 주인공은 모두 신성로마제국 당시의 선제후들이다.

성령교회 건물에 딸려 있는 구멍가게들
예술가와의 만남, 하우프트 거리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곳은 비스마르크 광장이다. 이 광장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유난히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골목길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골목길의 이름이 하우프트 거리다. 하이델베르크의 주요 관광명소들이 보행자 전용도로인 이 골목길에 밀집되어 있다. 곳곳에서 작은 공연을 펼치는 무명 예술가들도 만날 수 있다.
하우프트 거리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1441년에 지어진 성령교회다. 교회 건물에 딸려 있는 500년이 넘은 구멍가게들은 하이델베르크의 명물 가운데 하나다. 교회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1945년 8월 6일이 새겨져 있어서 눈길을 끈다.
성령교회 맞은편에 있는 ‘하우스 춤 리터’는 여러 차례의 전쟁 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중산층 저택이다. 1592년에 프랑스 사람인 칼빈주의자 샤를 벨리에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한때 하이델베르크 시청으로 사용되었으며 1703년부터 지금까지 300년 가까이 호텔로 이용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하이델베르크는 ‘대학도시’다. 그 중심에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있다. 1386년에 설립된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체코의 프라하 대학,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대학과 함께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손꼽힌다. 독일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헤겔과 분센 버너의 발명자인 화학자 분센은 한때 이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었다. 하이델베르크의 하우프트 거리를 걷다 보면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오가는 젊은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들 대다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학생들이다. 강의실이 일반 주택이나 상가건물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1712년부터 1914년까지 치외법권 구역이었다. 따라서 가벼운 죄를 지은 학생들은 자치기구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 ‘학생감옥’이라 불리는 곳에서 감금 생활을 했다. 대학 생활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사고를 치고서 감옥행을 자처한 학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학생감옥에 들어가 보면 당시 대학생들의 낭만과 고뇌 등이 벽과 천장에 알록달록한 낙서로 남아 있다.

헤이델베르크 성(Heidelberg Castle)에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및 네카르하이델베르크(Neckar_Heidelberg), 바덴 뷔르템베르크(Baden Wuerttemberg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 촬영지, 쉐펠하우스

하이델베르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얘깃거리는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이다. 본래 마이어 페르스터의 5막짜리 희곡인데, 1901년에 초연된 이후로 여러 차례 영화와 연극으로 제작되었다. 황태자 칼 하인리히와 여관 하녀 케티의 ‘아름답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담은 이 영화는 대부분 하이델베르크에서 촬영되었다. 그 대표적인 명소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 선술집인 ‘쉐펠하우스'다. 영화 속에서 황태자 하인리히가 흥에 겨워 축배의 노래를 부르던 장면, 케티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부지런히 맥주잔을 나르던 장면 등이 쉐펠하우스에서 촬영되었다.
쉐펠하우스 근처에는 네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카를 테오도어 다리가 있다. 다리 한가운데 서서 바라보는 하이베르크 성과, 다리 건너편의 울창한 숲의 정취가 특히 낭만적이다. 다리를 건너 숲 속으로 들어가면 ‘철학자의 길’이 이어진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이 걸었던 산책로다.